비오는 날

나열, 감정의 나열

2017. 10. 19. 06:31

  비오는 날의 세상은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을 흐리멍텅하게, 자세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가로수에 비치는 빗줄기는 어린아이가 색칠해 놓은 동화 속 세상 같고, 땅에 고인 웅덩이들은 기름이 펄펄 끓는 용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들은 해가 있을 때보다 선명하게 색을 들어내었고, 그들이 비추는 빛은 누군가가 손전등을 비추듯 길다란 원뿔모양으로 세상을 퍼뜨렸다. 온몸을 때리는 점과 같은 차가운 액체는 나의 몸을 조그맣게 미친 듯이 울렸고, 그것들은 땅에 떨어져 소리없는 액체로 되어 버렸다. 가끔씩 그들의 그 소리 없음이 모여, 작은 음악을 만들었고, 그것은 곧, 무척이나 그리운 마음으로 변해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런날은 이상하게도 피부는 차가운데, 가슴은 계속 따듯하고 먹먹하기만 한다. 그 먹먹함에 취하려고 눈을 감으면, 미칠듯한 차가움이 다가와 잠들려던 정신을 깨운다. 아스팔트를 적신 빗물 위로 달리는 자동차소리는 멀리서는 매우 그립고 가깝게는 귀를 찢어놓을 것만 같다. 비 오는날의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빠르게 창문으로 날라와 천천히 흘러내리는 빗소리다. 그들은 빠르게 날라와,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모두 주고는, 천천히 흘려 내린다. 가끔 그것이 엄마, 아빠의 이미지로 변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천천히 사라져가는 빗방울과 땅에 스며드는 그 모습은 지독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만다.

  누군가 빗물로 악기를 만든다면, 그것보다 슬픈 악기가 또 있을까. 길게 펼쳐진 길은 비가 와서 그런지 더 길게만 보인다. 빗물에 비친, 그동안 숨어있던 것들이 반짝이며 자신들을 주장한다.

  빗물이 박힌 창문은 눈물에 갇힌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것은 그대로 작품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비를 그리워, 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매일 비가 내리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비는 우리를 가둬두기 때문에, 그 제약 속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를 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나갈 수 없기에 창밖을 보고, 창밖을 보기에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하루종일 있다면 그 방을 유심히 관찰하며, 세세하게 보는 것처럼, 우리는 비에 갇혀 비라는 제약을 받아 태어난 이야기와 느낌들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렇게 비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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