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가 뼈만 남는게 아닌가 싶어.

잡담

2017. 10. 19. 06:17

다리를 다친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미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고,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컴퓨터를 하나가 지팡이 손잡이에서 나는 나무냄새를 맡고는 미친년처럼 낄낄거릴 수도 있으니까.
물론 집에서만 그럴 수 있는 거다. 밖에 나가면 목발이라는 녀석이 나의 겨드랑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깊은 상처를 내버리니까…. 지팡이가 껴들 틈이 없다. 거기다가 지팡이가 밖에서까지 나를 따라 온다면 더러워질 나의 집은 어떡한가. 지금도 나는 한쪽 발을 쪼그린체로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하며 지팡이 손잡이를 코에 갖다대고 있다. 이상한 나무냄새.
그러고는 약 먹는데 절대 먹지 말아야 할 술을 모니터 옆에 놔두고 있다. 먹을려고….
와인. 먹어본지 오래됐다. 맛있는 것도.. 저번에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와인은 너무나도 달달했다. 정말로 포도 쨈에 물을 탄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셋이서 쿠키랑 같이 마구 먹어댔다. 포도주스의 달콤함은 있지만, 날카로운 느낌이 없었던 달달한 와인. 오늘은 그걸 그리워하며 새 와인을 땄다.
하지만 역시나 독한 술냄새가 풀풀 난다. 그래도 어디서 들은 건 있어가지고 와인을 따서 잠시 기다린다. 공기랑 접촉을 해야 향이 더 좋고 맛나데나 뭐래나..
그나저나 이 지팡이는 정말 마음에 쏙 든다. 반질반질하게 처리된 손잡이를 코에 갖다대면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팍! 하고 온다. 코에 모든 오감이 존재하는게 아닌데 부드러움부터 밍밍한 맛까지 전해져 온다. 그래도 씹으면 나무 맛이 나겠지.
어느새 와인 잔을 바라보니 와인을 따르고 싶어진다. 마셔볼까, 아직은 냄새만 독한데 뭐.
그래 마셔보지 뭐. 저번엔 달콤한 꽃내음이 풀풀 나던것도 마셔보니 예상을 깨고 독하기만 했잖아.
이번엔 다를지 몰라. 독한 냄새에 달콤한 맛. 어때? 그러면 정말로 치명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마셔보니 예상과 다르게 밋밋하다. 독한 냄새는 사라지고 밋밋한 물만 있을 뿐이다. 미지근한 밋밋한 물. 그런데 저번에 뜨거운 정종(사케)을 마셨을 때처럼 뱃속에서 무언가 뜨거운게 올라온다. 그래도 그 정종은 꽃내음이랑 같이 올라왔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약을 안 먹는 건데 그랬다. 근육이완제? 그딴건 그냥 술을 마시면 되는게 아닌가!
이러다가 너무나도 오래 삶은 고기의 비계처럼 축축 늘어져버리는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곤란한데……. 살이 뭉쳐져 있지 않고 흘러내린다. 그러면 나는 뼈와 핏줄만 댕그러니 남아 있겠지. 어이없는 웃음만 난다.

 

 

 

 201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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