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나열, 감정의 나열

2017. 10. 19. 06:32


가을비가 내렸다. 하늘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멀리 보이는 짙은 회색빛 사이로 촉촉한 비 냄새와 더위를 잡아먹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런 가을비가 어쩌면, 너무나도 지독할지도 모른다. 초록잎을 잡아먹는 차가움에 오늘도 많은 초록잎들이 스물스물 갈색으로 바뀌고 그 갈색 잎들은 결국 점점 진해져, 모든 촉촉함을 빼앗기고 만 후에야 바스락 하고 부서져 사라져버린다. 아주 조그맣을 때부터 초록색이었던 잎은 그저 한낱 가을비에, 그 차디찬 바람에 결국 색을 잃고야 만다. 누가 그 초록색을 가져갔을까. 차가운 비 탓을 해보기도 차가운 바람을 탓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스스로 갈색으로 되어버린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초록색이었던 나뭇잎은 다시 자신의 색깔을 되돌리지 못한다. 그저 그 추억 속의 이야기를, 자기자리에 다시 태어날 작은 초록 잎에게 하는 수밖엔 없다. 그리고 잎은 말한다.
'병충해로 갈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간에 힘이 들어 갈색이 되어버리면 안된다. 너는 끝까지 남아 가을비를 겪고,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며, 갈색으로 변해가야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된 너의 모습을 보며 큰 자괴감에 빠지진 말아라.
언제나 잎은 지기 마련이고 그 지는 잎은 곧장 갈색이 되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여러 사소한 일로 그렇게 쉽게 져서 부스러기가 되는 것보다 그 추위와 그 바람을 이겨내고 최후에 갈색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최후의 갈색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최후의 그 자리에서 아무 잎도 없는 그 자리에서, 굳건히 홀로 서 마지막 자신의 위치를 뒤돌아보며, 모든 것들이 초록색이 아니었을 때의 세상을 본단다. 어찌 보면 그것은 최초의 시작이자, 정말로 마지막 끝자락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 남은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자, 부스러지기 전의 너에게 새로운 꿈을 또다시 안겨준단다.
니가 만약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낸다면, 너는 그 부스러기가 되기 전에 너는 아마 그 모든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부스러기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또 다른 세월의 축척이지. 너의 이야기, 경험, 감정, 그 모든 것들이 양분이 되어, 다음 자손들에게, 다음에 자라날 잎들에게, 다음에 자라날 나무에게, 너는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를, 삶의 지도를 네가 주는 것이지.'
왜인지, 가을에 색이 변하여 떨어지는 나뭇잎에, 너무나도 큰 슬픔과 그 큰 슬픔을 다 느끼기도 전에 부스러지는 것을 보며,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려는 가을의 나뭇잎을 보며, 가을은 참으로 지독하구나. 정말로 지독하고도, 쓸쓸하구나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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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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