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너의 놀라움이 되고 싶었다. 지루한 현실에, 흥미가 떨어지는 일상에, 나는 항상 너에게 특별함을 주고 싶었다.
그 겨울도 그랬다. 너가 학원을 끝나고 내려오는 그 건물 입구에서, 나는 조용히, 사람들의 시선을 빗겨 너를 기다렸다.
그리고 니가 내려오고 평소처럼 스마트폰을 보며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는 살며시,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나타나 커다란 곰인형을 주었다.
너는 너무나도 기뻐했다. 갑자기 나타난 너의 연인에, 나의 키스에.
편지에서 삐삐로, 핸드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점점 발달해가는 통신수단 속에서, 우리는 기다림 없이 소비되어가는 그런 인연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림을 좋아했다. 당연히 그 기다림이라는 건, 상대방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는 기다림이 아닌, 그 사람을 떠올리고, 같이 있었던 추억을 더듬어가게 하는 그런 단단하고 아련한 것들의 나열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나열들을 했고, 너를 만났고, 너도 그런 나열들을 했고, 나를 만났고, ...그래,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그렇게 사랑을 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너도 가끔,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함이 되었다. 퇴근하는 길에 건물 뒤편에서,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가끔은 회사 맞은 편 편의점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너. 너를 맞이하는 나. 우리는 그렇게 지친 업무에, 지친 하루 속에서, 서로에게 작은 선물이자 활력소가 되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웠다.
물론 업무에, 일상의 바쁨에, 백일이니, 무슨 무슨 데이니 하는 것들을 잊어버리곤 했지만, 그보다도 너가 가끔, 내 일상에 작은 선물처럼 방문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그날이 기념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급작스럽게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금요일날 저녁에 갑자기 나타난 너를 잡고, 갑자기 나타난 나를 잡고, 우리는 모르는 버스를 타고 우리가 모르는 곳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어딜 가든 너와 함께라는 그 자체가 너무도 좋았다. 어떤 여행일정이 아닌, 너와 내가 가다가 멈춰서 무언가를 구경하고, 가다가 지루할 때 쯤 멈춰서 쉬고, 가다가 멈춰서 맛집일거라고 자기암시하며 들어간 식당에서도.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이 여느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병에 걸린 너를 보았을 때, 너무나도 지독하게 아팠다. 이 행복이 부숴지는 것 같아, 나 홀로 너무나도 울었다. 아마 너도 그랬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여느 커플들과는 달리, 메신져를 통한 이야기보다,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우리들로써는 서로를 만났을 때,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또 다시 너에게 작은 놀라움을 주려는 듯, 갑작스럽게 너를 찾아가 오늘의 일들을 재밌게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마치 너가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처럼.
어느 날 수술날짜가 잡혔다. 너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그래, 마치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나에게 작은 놀라움을 주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 수술에 성공할 것처럼.
나는 이 추운 겨울 날 퇴근을 하며, 혹시나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어딘가에 니가 숨어있지 않을까하고.
그래, 나는 가끔씩 가정을 하곤 해. 그렇게 사라진 너가, 서프라이즈! 하며 어딘가에서 나와, 나를 놀래켜주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니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나는 그저 끝없이 되풀이 되는 허전함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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