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아가씨

나열, 감정의 나열

2017. 10. 19. 06:13

요즘들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면, 한 어여쁜 아가씨를 자주 보게 되었는데 가끔씩 가다가 그녀가 눈에 박혔다.
단아한 스타일의 그녀는 때로는 서서, 때로는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는 항상 내가 타는 버스보다도 늦게 왔다. 그러다보니, 한번 그녀를 인식하고 난 후로부터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것도 그런게 매번 이곳에서 마주치다보니, 처음엔 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는 나보다 먼저 버스를 타지 않았고, 내 버스는 언제나 그녀의 버스보다 일찍 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래서인지 내 머릿속에는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봄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와 봄의 시작을 알릴까 싶은 경계의 날. 언제나처럼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내 앞에 그녀가 또 다시 나타났다. 오늘도 그 어여쁜 아가씨는 어느 때와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서서 기다리다가, 다시 또 앉았다가, 다시 버스를 바라보는 듯 하더니만 어느새 고개를 돌려 먼 곳을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어여쁜 아가씨는 어떤 버스를 타기에 이렇게 매일 기다리고 있냐고…….
겨울바람이 약해져서인지, 아니면 봄바람이 살랑였는지, 나는 그날. 그녀가 어떤 버스를 타는 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뭐 약속시간에 조금 늦더라도, 어차피 버스는 대부분 30분 안에 오니까. 그 말은 내가 엄청 늦어봐야 30분이라는 소리니까. 나는 조용히 약속을 잡은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한 4~5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 그러기를 30분. 그녀가 탈 버스는 오지 않았다. 버스가 아니라 차를 기다리는 건가……? 나는 약간 의아해하며 계속 그녀가 탈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1시간. 그녀가 탈 버스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나는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초조한 마음에, 이곳에 오는 버스 번호를 다 머릿속에 떠올려보았지만, 그 버스들은 이미 이곳을 한번 이상 왔다 간 버스들이었다.
또 다른 버스가 있는 걸까. 새로운 노선이 추가 된걸까.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혹시 차가 올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기다리는 그 무언가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 
아직 봄이 완벽하게 오질 않았는지, 나는 불어오는 추위에 손을 싹싹 비비고는 킁하고 밀려오는 콧물을 다시 콧속 안에 집어넣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기, 킁. 아까부터 뭘 기다리세요?”
약간은 주제넘은 질문일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살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연을 기다려요.”
뜬금없는 대답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청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미 물은 사람으로써 예의도 아니고 목소리도 매우 좋은 바, 대화를 이어갔다.
“그.. 인연이요?”
“네. 그 있잖아요,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오는거.”
그녀는 인연을 기다린다고 했다.
인연.
그녀는 너무나도 영화와 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와 소설들을 매일같이 끼고 살며, 매일을 보냈었다. 언제나 그녀의 가방에는 소설책 두세권이 들어 있었으며, 그녀는 틈만 나면 소설책을 꺼네, 그 세계에 푹 빠지곤 했었다. 집에서는 언제나 영화를 보며 울먹이거나, 웃거나, 무서워 벌벌 떨기도 했으며, 밖에서는 친구들과 영화이야기나 소설의 내용을 주제를 안주삼아 분위기에 취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덧 모든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졌을 때. 어떤 이야기를 읽고 보아도 무언가 텅 빈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덧 점점 방황은 심해져, 스스로 공황상태에 빠져버렸고,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꿈, 미래, 행복... 그 무엇 하나 없었다고 했다. 아니, 남아있는 것은 갈망. 소설속이나 영화 속의 세계에 대한 갈망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매우 침울했다. 소설속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는 어차피 만들어진 이야기일뿐. 그녀 앞에서는 그 어떤 소설속의 이야기나 영화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슬프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니, 슬픈 것은 잠시. 일반인의 대열에서 보통사람처럼 살았다고 했다. 어차피 자신은 어느 소설속의 주인공도 아니기에. 그저 포기를 한 체로, 일반인들과 똑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단 한번뿐인 삶이. 그렇게 푸르죽죽하게 없어지는 것은 너무도 싫었다. 보통사람들처럼 살기 싫었다. 자신도 한번쯤은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발로 뛰었다.
언제나 가만히 자신의 삶을 받아드리기는 너무도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간이 날때마다, 바깥을 돌아다니며 여러사람들을 만나고 여러사람들과 친해지고 여러사람들과 웃는 일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어느덧 그녀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흥미가 떨어지고, 오히려 쓸쓸함만을 느끼며 그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어디에도 그 소설 속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들과 멀어져 버렸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질렸고, 사람들에게 실망했다.
그녀는 절망했다.
‘나는 소설속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은 될 수 없는걸까.’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울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삼일째 보내는 순간.
엄청난 허무감이 밀려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뒤 이어서 쓸모없는 삶을 보냈다는 자괴감까지.
하지만 그녀는 무너질 수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나약한 자신이 미웠다. 아니, 싫었다. 그녀는 이렇게 허무한 아무 것도 없는 자신과 그리고 그 삶에 증오를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까지 증오를 할 수만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야기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빠져살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삶을 허무하게 놔둘 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현실과 타협했다. 그래서 그녀는 조그마한 포기를 배웠다. 그래서 그녀는 조그맣게 포기했다. 아주 조그맣게.
포기는 현실과의 타협의 끈을 만들어주었다.
일반인이 뭐 어떠랴, 그곳에서 행복만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곳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만족을 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웃으며 따듯하게 살아갈수 있다면. 그것이 내 작은 삶의 행복이자, 정말로 행복한 삶이 아닌가 하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기분으로 마지막으로 이곳을 왔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그런지. 훌훌 털어버린 마음이 아직 남아있었는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만난 것이다.
그리고 나와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나에게 그녀가 바랬던 그 많은 이상들과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얻게 된 작은 여유와 행복을 이야기 한 것이다.
어느새 카페에 앉아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흠, 이런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니, 괜한 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포기하지마세요. 단지 그것을 약간 미뤄두세요. 언젠가는 그 쪽에게도, 당신을 위한, 당신의 봄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때를 기약하고 잠시만, 아주 잠시만 미뤄두세요. 그리고 당신의 봄날에. 당신이 바라던 행복을 피우는게 어때요?”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막았다. 하지만 눈물은 그녀의 손을 타고 팔목을 지나 팔꿈치로 향해 흘러내렸다.
“이미 지쳤어요. 나는 어떤 주인공도 될 수, 아니 어떤 주인공도 아니었어요. 내 삶은 이대로 흘러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그녀는 울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조용하게. 하지만 그 슬픔은 마주보고 있는 나를 지나 이 공간 전체에 퍼져버릴 것만 같이 강했다.
“그러니까 잠시 미뤄두라는거에요. 누구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나,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다 똑같은 걸요. 영화 속 주인공이나, 소설 속 주인공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살펴보면 지루한 나날들도 있었고, 바보 같은 짓도 많이 했을꺼에요. 하지만 언제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들만을 보여주죠. 그것도 가장 재밌거나, 가장 흥미를 끄는……. 아마도 당신에게 올 봄날도 훗날 떠올린다면 아마도 그들의 단편적인 이야기처럼 멋지고, 아름답고, 달콤하지 않을까요? 저는 다르게 생각한거에요.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이고, 자신이 조연이고, 자신이 엑스트라로 있는 이 세상 사는 우리에 대해서 말이죠.”

그녀는 나를 조심스럽게 처다보고 있었다.

“잠시 미뤄둬요.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에게 갑작스럽게 그 일들이 찾아올꺼에요. 그때, 그때 잡고 당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내 이야기에 홀린듯 멍하니 커피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달리 따듯하게 보였고,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 일어나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냥 궁금했어요. 약속시간에는 조금 늦었지만, 오늘이 아니면 못하는 일도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좋은 이야기가 찾아오기를 바랄께요. 안녕.”














이야기를 사랑했던 이유. 그 세계를 좋아한 이유. 그것은 행복을 채우지 못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행복을 향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엑시무스 레드에디션)

 

 

 

 

 

2010.07.11 

'나열, 감정의 나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0) 2017.10.19
단풍  (0) 2017.10.19
사라지지 않는 소년  (0) 2017.10.19
초저녁의 겨울  (0) 2017.10.19
K  (0) 2017.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