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은 균열

나열, 감정의 나열

2017. 10. 19. 06:23

 그녀의 기억에는 작은 균열이 있었어. 아주 작은 균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작은 균열이었지. 예를 들자면.. 그래! 밤에 불을 모두 끄고 스텐드에만 불을 켜 놓은 상태로 말야. 구멍 뚫린 종이를 스텐드 전등부분에 가까이 대면 그 작은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잖아? 그치? 그래, 그것처럼 그녀도 그와 비슷했어. 아주 작지만, 어떤 형태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균열. 그런것 말야.
  하지만 앞의 말처럼 사실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어. 사실 밝은 날에서 그런 균열은 아무것도 아니었거든... 햇빛에 가려 티도 안났으니까.
  음... 잠깐, 잠깐... 좀 이야기가 멀리간거 같아... 음...그래, 다시 단순하게 말하자면 말야, 단지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었을 뿐이야. 그래, 그게 좋겠다. 그녀는 TV에 어느 배우가 나오면 그 배우가 남동생이라든지, 아버지라든지, 뭐 대충 이상한. 자기와 관계된 무엇이라고 그녀는 믿었던거지. 그래서 그녀는 가끔씩 TV를 보다가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피에로야, 너는 그래도 잘살고 있구나' 하고 중얼거리곤 했어. 조금 이상하지? 하지만 조금 더 이상했던 것은 그 대상이 조금은 특이할 때도 있다는 것이었지. 어느 날은 그녀가 TV에 나온 황제 팽귄을 보면서 자신의 동생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던 걸?
  그래.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작은 균열을 가지고 있었어. 나는 그 균열 사이로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녀는 균열을 가지고 있었지.
  나와 그녀의 첫 만남 때도 그럤어. 글쎄 평소와 똑같이 길을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여자가 나를 보고 자신의 연인이 아니었냐고 하는게 아니겠어? 그때 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너도 생각해봐, 마냥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와서 자신의 오랜 연인이 아니었냐고, 어디 갔었었냐고 울어버린다면 어땠겠냐고.
  하지만 그날은 내가 너무 어두웠던거 같아. 그래서 그 균열 사이로 보이는 빛이 정말로 나의 세상 전부를 밝혀주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지. 평소라면 미친여자가 개소리하고 앉아있네 하며 지나쳤겠지만, 그날은.... 맞아.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그녀를 만났어. 그리고 이야기했지. 나와 그 연인이 닮았나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당신의 옅은 갈색의 눈이 너무나도 똑같아요. 당신의 낮지만 귀여운 콧날이 너무나도 똑같아요. 당신의 와이셔츠에서 나는 향이 그와 너무나도 똑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잠시 숨을 골랐어. 나는 조용히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어. 그리고 그녀는 입을 열었지.
  당신은 믿어주었어요.
  순간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어. 도대체 무엇을 믿었다는 거지? 나는 그냥... 그냥 그녀의 손을 잡았던 것뿐이데...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알 수 없는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그때 홀렸던 것일지도 몰라.
  하여튼 그 다음이야기는 이래. 나는 그녀와 사귀었어. 첫 만남 때부터 짐작하고, 아니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었어. 아니, 작은 균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 하루는 이랬어. 그녀와 데이트 도중 밥을 먹으러 가는데 아버지가 가게 앞에 있다는 거야. 아직 자신은 아버지에게 나를 소개할 자신이 없다고 하며 다른 가게로 가자고 했지.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주변을 은근슬쩍 둘러보았어.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없었는걸? 그래서 밥을 먹다가 그녀에게 물었어. 아버지가 어디 계셨냐고... 그랬더니 그녀는 지금도 그 가게 앞에 아버지가 있다는 거였어. 그래서 나는 그 가게를 슬쩍 본 뒤, 다시 한번 물었지. 어디에 계셔? 하지만 그녀는 계속 그 가게 앞에 아버지가 있다고 했어. 그래서 슬쩍 다시 보려고 하니, 그냥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게 앞에 있는 조그마한 그네를 가르키는게 아니겠어? 그러면서 그녀는 그것이 아버지라고 했지. 그래서 순간 섬뜩한 기분에 혹시 귀신이 보이냐고 물어봤어.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거기에 있는 흰 그네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했지. 나는 순간 벙쪘지만, 그녀의 순진한 얼굴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어.
  그때부터 그녀가 남들과 다른, 어떤 균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느끼기 시작했어. 어느 날은 또 이랬어.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도중에 그녀가 반가워하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 거였어. 나는 뭔가 싶어 그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렸지. 그랬더니 그녀는 작은 오리 조각에 인사를 하는게 아니겠어? 나는 처음에 순수한 여자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녀가 점점 그 조각과 이야기를 하더니, 결국에 언성을 높여 싸우더라구. 그래서 물었지 무슨일이냐고. 그랬더니 그녀가 그랬어. 이 아이는 자신의 동생인데, 땅에 있고 싶어한다고. 하지만 이 녀석의 집은 하늘이라고. 하지만 땅이 너무 좋아 땅에만 있다가 바보 같이 굳어버렸다고 말야. 나는 동화같은 그녀의 이야기에 웃고 말았어.
  하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 될수록 나는 짜증과 거절대신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지. 그래, 나는 솔직히 살짝 미쳤었는지도 몰라.
  이런 여자와 만나고 있고, 이런 여자를 이해해주려고 했다니. 당신도 글로 읽고만 있어도 떠오르는 그 장면들에서 무언가 많은 이질감을 느꼈잖아.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실제로 만나니, 어땠겠어? 거기다가 그녀에게 흥미까지 느끼고 말야...
  난 미쳤었나봐. 하여튼 나는 그녀를 계속 만났어. 그리고 그녀의 균열에 대한 정체를 파해치기 시작했지.
  다시 스텐드로 넘어갈께. 사실 낮에도 구멍뚫린 스텐드 사이로 빛은 나오고 있어. 다만, 낮이 너무나도 환해서 그 불빛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거지. 더 밝은 빛이 나오니까... 하지만 어두운 빛이 나왔다고, 그 빛이 그림자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 그저 밝은 빛 속에서 빛을 못내고 있는거지. 하지만 밤이되면 세상은 어두워지고 빛은 점점 사라져 가.
그러면 계속 나오던 그 빛은 빛을 못내고 있던 그 빛이 아닌 밝은 빛으로 자리를 잡게 되지. 그때서야 그 종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곳에 빛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지.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어. 어려서 우리는 밝은 곳에서 있었지. 그래서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꿈들을 손에 쥘 수 있었어. 비록 그것이 나의 빛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늦든, 빠르든, 어둠은 찾아왔지.
  어둠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빛이 필요했어. 그래서 누구나 빛을 찾아 해매고 다녔지. 그래서 늦든 빠르든, 어딘가에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빛을 다시 찾았어. 뭐, 영영 못찾는 사람도 있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른체로 말야.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하지만 그런 빛과 다른 빛도 있었어. 그녀는 그동안 항상 밝은 곳에 있었지. 그래서 아무도 그녀의 작은 균열을 알아보지 못했던 거야. 아니 사실은 균열이 없었는지도 몰라. 어둠 속에서 그녀는 빛을 바라보기 위해 균열을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하여튼 어둠을 알고 난 후에야 그녀는 빛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어. 하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빛도 있었지. 당연하잖아?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아마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빛을 찾았지. 찾고 또 찾아봐도 그녀 주위엔 그 빛은 없었어. 아마, 그녀는 그 빛이 사라질 때 알고 있었을 지도 몰라. 돌아오지 않는 빛이라는 것을. 그래, 하지만 지독하게, 무언가를 지독하게 원한다면 가끔씩 다른 것들이 그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그녀도 그랬던 거 같아. 그녀는 억지로 비틀고 쥐어뜯어 빛을 굴절시켰던 거 같아.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빨간색도 찾았고, 주황색도 찾았고, 노란색도 찾았어. 초록색도 찾았고 파란색도 찾았지만, 미안하지만 보라색은 조금 놓친거 같네. 하여튼 그녀는 빛들을 찾았어. 어때? 이제 뒷이야기를 알 거 같아? 그녀가 보고 싶었던 것을 비틀어 그것들을 보았다고?

  맞아. 그녀는 균열을 가지고 있었고, 그 균열사이에서 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지. 하지만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야.
  나는 어두웠어. 밝게 살아가는 듯 했지만, 언제나 그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지. 사실 생각하자면, 어두운 모습을 털어버리고자, 잠시 기운을 내봤던 것 같아. 아니면, 너무나도 불쌍해 보여서,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여서. 나는 연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순간 나는 빛을 본거야. 어떤 빛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그저, 이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빛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던 거 같아. 그래서 그녀를 만났지. 나는 빛을 만나 세상이 밝아졌고, 행복했어. 하지만 이 빛이라는 게, 스스로 밝아지지 않으면 쓸모가 없더라고. 그걸 느낀게 겨우 어제였어. 그동안 그녀를 쭉 만나오며 밝았던 빛들은 나의 빛이 아니었지. 그래서 잠시마나 따듯하고, 세상을 볼 수는 있었지만, 곧 어둠이 다시 찾아왔어. 그녀는 알았어. 스스로도 자신의 균열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 스스로도 모순이 되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모순덩어리잖아? 그래서 그녀는 약간은 안심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보는 눈이 달랐지. 나는 세상이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세상이 규칙에 의해, 법칙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모순은 엉터리 녀석들이 자신들의 규칙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했었어. 그랬더니, 그녀는 웃으며,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넌 가려낼 수 없다고 이야기 했지. 그래서 너는 모순 중에 하나라고 말했어.
  그래서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어.
  그리고 이야기했지. 아니, 너야 말로 나를 바로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너의 모순이 끝나지 않겠냐고.

 

 

 

2012.07.23

'나열, 감정의 나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으로  (0) 2017.10.19
멈춰버린 사랑  (0) 2017.10.19
봄, 여름, 가을, 겨울.  (0) 2017.10.19
W가 그랬다.  (0) 2017.10.19
차가운 겨울비, 카페  (0) 2017.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