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직시한 순간

나열, 감정의 나열

2025. 6. 11. 23:11

 

  "과장님, 저한테 관심있었죠?"

 

  우연히 만난 술자리에서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발언에, 나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티를 안낸다고 나름 혼자서 많이 노력했는데, 그게 그렇게나 보였었나? 그 짧은 순간,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왔다갔다 하다가, 나는 이내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좋아하는 감정은 재채기와 같아서, 숨길라해도 숨길 수 없다고들 하니까.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그녀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맞아. 한때는 그랬었지."

 

  순간 커다래진 그녀의 눈을 뒤로한 체, 그렇게 나는 나의 마음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도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느꼈던 감정이라, 사실 당시에 주체할 수 없었어. 한동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한번 터져나오니까, 나도 당황해서 멈출수가 없더라고."

 

  나는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머쓱한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의 고백에 당황한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을 낸다면, 더욱더 어색해지겠지.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래서 지난한 시간을 보냈어. 아주 길고, . 지루하다 싶을 정도의 긴 시간을. 하지만 갑자기 터져나온 감정의 봇물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피하려하면 자꾸 떠오르고, 가라앉히려 할수록 그것은 점점 커져 수면위로 떠오르더라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내 의식의 바닷속에서 가장 윗부분을 부유하고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더라고. 마치 멀리서 보면 그것이 전체를 대변하듯이 말이야."

 

  나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남들이 하는 말처럼, 시야에서 멀어지면, 잊혀진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은 떠난다를 실천해봤지만, 그건 나에게 맞지 않는거 같았어."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은영이 입을 열었다. 그녀도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이 보였다.

 

  "직시했어."

 

  "직시?"

 

  전혀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었을까. 그녀들의 표정에는 물음표가 가득해보였다.

 

  "마음을 직시하고 왜 좋은지, 왜 계속 생각이 나는지, 나는 왜 여기에 매달리고 있는지, 나의 감정을 크기는 어떠한 수준인지, 스스로에게 물었지."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스스로 내뱉다니,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아마, 그렇게 스스로에게 차분히 마음을 돌아보는 일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 왜냐면, 사실 내 타입도 아니었고, 내가 생각한 여성상도 아니었고, 첫 눈에 반했다는 순간도 없었으니까."

 

  고백의 대상자인 그녀는 이제는 당황보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제 3자의 입장에서 흐음 하는 추임새로 이 지난한 고백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렇게 직시를 하니까, 나도 몰랐던 나의 취향에 대해서 알게 되더라고. ', 사실 나는 저런 타입의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하고. 그렇게 그걸 정리하니까. 오히려 부유했던 감정들이 점차 가라앉고 오히려 차분해졌어. 이상한 일이지."

 

  이상한 일. 감정을 직시하는 순간 가라앉는 감정이라니, 누가 들어도 이상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그랬어. 갑자기 미친듯이 생겼던 짝사랑이라는 감정이, 그것을 직시한 순간 형태가 보이게 되더라고.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신기했던 순간이었지."

 

  "그래서 그 형태를 어떻게 하셨는데요?"

 

  "아니, 그보다도 어떤 형태였어요?"

 

  은영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내가 그것을 어떻게 했나와 어떤 모습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나를 떠올렸다. 그녀들의 눈에는 흥미로움만이 가득했다. 하긴 관념적인 것을 형태로 인식했을 때, 그리고 그 관념적인 것이 모두들 잘 알고 있는 것일 때, 그리고 그것들을 객관적인 척하며 그러한 상황을 설명할 때, 누구든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형태를 본다는 것은, 내가 이 감정이 다 사라지고 났을때, 그곳의 부재를 알게 된다는 거야. 한마디로 이 미친 감정들이 계속 어떻게든 나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누구든 그 감정을 표홀히 떠나보내고, 정말로 한때의 추억으로만 남았을때, 그 때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거지. , 내 마음속에서 이제 떠났구나하는 순간을 여느때보다도 빨리. 그렇기에 나는 그저 때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나는 예전과 다르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때를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나요? 뭐 빨리 잊기 위한 그런거는?”

 

  은영의 말에, 나는 두 손을 들며 그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제 또 이렇게 셋이서 하는 술자리가 흥미진진할 수 있었을까. 나는 찰랑거리며 반쯤 남아있는 술잔을 손에 들며, 그때의 감정을 떠올렸다.

 

 

 

 

 

 

  너무 큰 감정은 그 감정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감정을 직시하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몇몇 단어로 규정하는 순간 그 감정은 그때부터 서서히 활동성과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더이상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로, 더이상 영양분을 주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니까. 그래서 어떠한 것으로 규정시킨다는 것은, 내가 그 감정에 영양분을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너무나도 큰 감정을 몇가지 단어와 문장으로 분리하여 쨈통 안에 넣고 뚜껑을 닫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을 단단한 유리병안에 담아 마음속 깊숙한, 이름모를 바다에 숨겼어. 그러다보면, 어느새 파도에 떠밀리고, 떠밀려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떠나겠지, 가끔은 보일지 몰라도, 표류하고 있는 그 쨈통을 망망대해에서 찾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어느새, 먼 훗날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겠지. 여러 추억들과 함께. 이것 또한, 어느날의 한 추억같이 될꺼니까."

 

  인생은 모든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추억 일기장을 만든다. 그걸 펼쳐보는 시간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언제나 먼 훗날의 이야기었다.

실패의 한 추억. 아니, 이게 실패가 맞긴 한걸까. 그때도 이게 실패라고 생각을 할까? 누군가는 말했다.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라고 실패를 하면서 성장을 하고 실패를 하면서 나아가는게 인생이라고. 그렇다면 그냥 이건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그러데, 지금 너의 그 감정, 그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고. 사람이 살면서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고."

 

  "그래서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나르시스트 같지만, 그말대로 나를 약간 제3자의 입장으로써 보듬아 줬지. 나는 나의 상태, 나의 그런 마음들을 사랑하기로 했어. 참 애틋하고 멍청하고 바보같은데, 그런 감정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런 감정들을 제일 잘 느꼈던 나니까. 결국 나는 나의 순간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더라고. ‘참으로 멍청한 사람이었다...’ 하면서"

 

  멍청한 사람. 나르시즘의 끝판왕 같은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어이없음에 모두가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 눈치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대해줘서."

 

  너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서로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세계로, 너는 너의 세계로. 언뜻 내가 너의 세계에 닿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지나간 추억으로 어느 모를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쨈통이 되어 훗날 회상할지도 모를 이 시간들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