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물흐물해진 표정
by RomanticPanic
겨우내 단단했던 마음이, 여름이 오자, 버터가 녹아내리듯, 흐물흐물해졌다. 그동안 단단한 가면을 둘러 이야기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흐물흐물해진 가면을 떼내며, 그들을 반긴다. 좋은 점은 그들에게 속마음을 쉽게 터놓을 수 있다는 점이었고, 좋지 못한 점은 그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할때마다, 표정도 흐물흐물하게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 중 하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신기롭다는 듯이 대했고, 이내 이런 바보가 있나 하며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을 처음 본 그들에게는 신비한 생물이자, 좋은 반죽거리였다. 그들이 툭하고 ‘진짜 찐따 같았어요’ 하고 치면 나는 톡하고 쏙 들어가 흐물흐물해진 나를 바라보며, ‘제가 찐따라 어쩔 수 없죠…’ 만을 대뇌일 뿐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나를 슥-쳐다보며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물론 흐물흐물해진 나에게 날카롭게 벼려진 말들을 그대로 내뱉으면, 그대로 깊숙한 곳까지 쑥하고 들어갈 것이 당연지사라, 그들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헤어지는 연인들을 보며 ‘에휴’ 하며 나로 시선이 이어지다, ‘미련한 곰탱이 새끼. 붙잡기라도 하지.’ 하며 애둘러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표현에 어지럽게 방황하기 시작한 나의 눈빛을 그들이 읽을 때 쯤이면, 다시 그들은 ‘으이구’ 하며 또다시 창밖을 쳐다보기도 했다. 나는 그럴때마다 무너지는 가면을 다시 슬그머니 얼굴위에 올려 놓고는 빈 곳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었다.
그들은 그렇게 여름에 흐물흐물해진 나를 붙잡고 웃었다. 그러다 가끔은 습도가 높아져서, 너의 농도가 떨어진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속이 다 비쳐보이는게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흐물흐물해지고 싱거워지기까지 하다니 단단히 더위를 먹었구나 생각하다가도, 아직 여름이 다 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이 여름은 얼마나 지독하게 더울까. 더 더워진다면, 흐물흐물해진 내가 다 녹는다면, 그 안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지다가도, 이렇게 싱거워지면 물이 되어버리는게 아닐까. 나의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다 비쳐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주섬주섬 표정을 기운다. 누더기 조각처럼 보였던 얼굴들을 기우고 나니, 피카소의 작품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세상 살아가는데 투명하게 모든 것들을 비추는 것보다 뭐라도 가리는게 있는게 나은거 같아 조금 마음을 놓는다.
언제, 언제 이 투명한 것들을 만날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언제, 언제 또 이 투명한 것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세상은 생각만큼 뒤뚱거리지도, 명확하지도, 모호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투명함이 계속 될까. 아니면 또 겨울와서 단단해질까. 고민을 하다, 한낱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인간들의 화학작용들 속에서 그저 정제수로써 부유한다.
언제나 질서 뒤에 혼돈이 왔고, 혼돈 뒤에 질서가 찾아왔다. 단단함 뒤에, 물렁함이 왔고, 짙은 가면 뒤엔, 너무나도 투명한 것들이 찾아왔다. 정제수로써 부유하고 있다면, 또다시 짙은 색깔에 물들어 모든 것들을 숨기고 안으로 들어가겠지. 또 다시 겨울이 온다면, 또 다시 작은 버터나이프 하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굳어버리겠지. 하지만 그조차도 불분명하다. 얼마나 물들지, 얼마나 다시 단단해질지. 아니, 다시 단단해질수도 있는지를. 그런 적확하지 않은 세상속에서 그래도 이것만큼은 어렴풋이 알게되는 것 같다.
세상은 복잡했고, 단순했으며, 사람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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