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Panic's Torso

우리는 지독한 여름을 견디고 있었다.

by RomanticPanic

 

  우리는 지독한 여름을 견디고 있었다.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동아리방을 데우고 있는 어느 여름. 우리는 하릴없이 동아리방에 앉아 그 지독한 햇빛을 사이에 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헤어진 거야?”

 

  오래된 선풍기 소리 사이로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건넸다.                           

 

  “, 견딜 수가 없던거지.”

 

  그녀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로 별것 아닌 일상의 대화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무게도, 망설임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여름의 햇살이 당연하다는 것과 같이.

 

  “너는?”

 

  그런 그녀의 물음에 나는 읽던 책을 잠시 멈추고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좋은 사람이라 만나는 건, 뭔가 이기적인거 같아.”

 

  “좋아한 거 아니었어?”

 

  그녀는 계속 무심하게 대답을 하며, 계속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대화가 주일까, 아니면 지금 보는 책의 내용이 주일까 생각을 하다가, 그녀를 슬쩍보니, 갑자기 생긴 대화의 여백에, 어느새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쁘고 좋은 사람이니까, 만나면 좋아하겠다 생각은 했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너는? 좋아하는데 견딜 수 없게 만든거야?”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앞머리를 쓸어 뒤로 넘기며 몸을 내쪽으로 당겼다.

 

  “나는 구속당하는 걸 싫어해.”

 

  “좋아하면, 계속 보고 싶어지는거 아냐? 어느정도 구속 당하고 싶기도 하고?”

 

  이어지는 나의 말에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책장을 넘겼다.

 

  “, 나도 그랬나보지 뭐.”

 

  다시 돌아온 그녀의 태도에 나는 조용히 다시 물었다.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재밌게 지낸거 같았는데?”

 

  “맞춰준거지. 걔가

 

  “그럼 좋은 사람 아냐?”

 

  “잘 맞춰주고 멋있고 좋은 사람이니까, 만나면 재밌겠다 생각은 했지.”

 

  “좀 이기적이네.”

 

  나의 말에 그녀는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이건 내가 고를 수 있는 거니까. 걔도, 나도.”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나긴 여백에, 그녀는 갑자기 보던 책을 뒤집어 책상에 엎고서는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너는? 너는 걔한테 선택지는 줬어? 너의 선택은 이기적이지 않았어?”

 

  “이기적인가?”

 

  “서로 좋아하는 온도가 다를 수 있잖아. 걔는 벌써 뜨거운거고, 너는 아직 미지근한거고. 하지만, 만나다보면 너가 더 오래 뜨거울 수도 있는거 잖아. 서로 시간이 엇갈린걸 만나다 보면 맞춰지는거고 그런거 아냐?”

 

  생각보다 복잡한 이야기에 나는 잠시 책을 내려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결국에 안 맞으면?”

 

  “이 꼴 나는 거지.”

 

  그녀는 다시 책을 펼쳤다. 순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빛이 너무나도 뜨겁다고 느껴졌다.

 

  “너는 맞춰줬는데, 왜 도망친거야?”

 

  나의 말에 그녀는 조용히 책장만을 넘겼다.

 

  “모르겠어.”

 

  “뭐가?”

 

  “이게 사랑인지.”

 

  나는 사랑이라는 형태에 대해서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사랑의 형태가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생긴걸까. 그리고 그걸 규격화 시킬 수 있는걸까. 가끔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을 보자면, 세상 사람들은 그걸 규범화 시켜놓고 조건을 달아놓았던데, 우리는 그 조건을 따라야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그 조건에 해당이 되는 사람일까. 길게 생각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게, 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구나.”

 

  내 삶, 이건 내 삶이었다. 내 것이었고, 내가 결정하는거였다. 선택을 위해 외부의 잣대를 가지고 오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어쨌거나 내가 좋아야 하는거였다.

 

  “그래서 결국 못 맞춰준거야?”

 

  “포기를 한거겠지

 

  두루뭉술한 문답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누가 20대에 연애를 많이 해보라고 떠밀었던가. 이렇게나 지독하게 상처를 주고 받을 것을. 누군가는 20대를 많고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하는 시기라고 말하지만, 정작 20대의 아이들은 여물지 못한 마음으로 모든 관계에 겁을 먹는다. 각 나이대마다 하면 좋은 것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단단하지 못한 마음들은 어리숙했고, 그 어리숙한 결정들 사이로 받는 상처들은 여린 마음에 너무나도 큰 고통을 준다. 어쩌면 나이는 고통의 역치를 확인하는 기나긴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와 나는 조용히 동아리방에서 이 지독한 여름을 견디고 있었다.

 

  “다음엔 잘 할 수 있을까?”

 

  너의 조용한 속삭임에 나는 그저 말없이 책장을 넘겼다.

 

  “몰라.”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는 조금씩 무언가를 배워나갔다. 하지만 역시나 모르는건 매한가지였다. 때로는 배우는 게 나을 수도,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는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그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러나 이제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하는 시기가 왔음에, 이제는 한번도 가지 못한 길들을 스스로 내딛어야하는 하는 현실에, 우리는 어느새 밖에 떠있는 지독한 여름이라는 계절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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