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by RomanticPanic
나는 어느 춥디 추운 겨울의 초입에 태어난 아이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나는 언제나 겨울을 사랑했고, 하얗게 변한 세상을 좋아했다. 겨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나는 겨울에 수많은 걸음들을 내딛었다.
하지만 반대로 뜨겁디 뜨거운 여름이 오면, 한번씩 심하게 앓아 눕기도 했다. 여름만 되면 이상하게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어느새 그것들이 녹이고 녹여, 겉으로 단단하게 감싼 나의 마음까지 녹여, 바깥세상으로 조금씩 흘러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여름을 싫어했고, 그런 열기들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오히려 추운게 나았다. 나는 추울 때마다 옷을 한겹씩 껴입었고, 조금더 추워진다 싶으면 온몸에 바깥과의 벽을 한두개씩 더 세우곤 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추위라는 것은 어느정도 버틸만 했다. 아니, 오히려 온몸을 패딩으로 감싸고 차가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렇게도 세상이 포근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항상 여름에 시작되곤 했다. 봄부터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의 사랑은 항상 여름이 되어서야 하늘의 태양과 함께 불타버리곤 했다. 나의 사랑은 지독하게도 뜨거웠으며, 끝나지 않는 여름의 더위처럼, 내 사랑도 항상 그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의 여름은 지독했으며, 여름은 항상 애증의 관계였다.
그런 어느날, 여름이 끝나갈 무렵,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찾아들..., 입추라는 시간을 맞았을 그 무렵,
나는 너를 만났다.
가을. 이 지독한 여름을 끝내고 맞이한 가을.
더위로 지친 나의 숨이 고르게 안정되었을 때, 나는 계절의 이름과 같은 너를 만났다. 너는 가을에 태어났을까. 언젠가 그렇게 물었던 나의 말에 너는 빙그래 웃어주었었다. 나는 그런 너의 웃는 모습을 사랑했다. 물론 내가 너의 얼굴에 항상 미소를 만들어주지 못할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처음 만난 그날도 그랬다. 이름도 모르는 체로, 어느 한 와인바에 앉아서. 같이 온 일행들이 모두 떠나고, 그 빈자리들 사이에 남겨진 우리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디서 왔고, 나는 어디서 왔다.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나는 당신의 눈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당신의 취미는 무엇이고 나의 취미는 무엇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다르지만 비슷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체로 서로의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우리는 가게의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웃다가 집을 향해 같이 걸었다. 나는 조용한 새벽에 너의 웃음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입을 열었고, 당신은 나의 재롱에 웃어주었다. 조금 입추가 지난 밤공기는 이상하게도 조금 시원했고, 지독한 여름의 온기는 이젠 새벽까지 닿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열기를 재우는 시간 속을 걸었고, 우리는 그렇게 가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당신의 이름을 물어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지금 우리가 들어선 계절의 이름과도 같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도 그제서야 나의 이름을 물어보고는 깜짝 놀랬다. 나는 당신의 다음 이야기였으니까.
가을과 겨울. 다르지만 비슷한 글자. 우리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글자만큼이나, 계절만큼이나 가까웠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받고, 이상하게도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지독한 여름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런가, 가을이 아직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지독한 여름날을 다시 만나는 날로 잡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가을이 왔을 때. 나는, 그리고 너는 연락을 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렇게 지독한 여름이 지나고, 여름에 했던 지독한 사랑들이 이제는 가을이 와서야, 가을이라는 계절에 들어서서야 모습을 보였다. 마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그런 당연한 순리인 것처럼.
우리는 길거리를 걸었다. 그 동안의 공백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길거리를 걸으며, 가끔씩 재밌어 보이는 상점가들을 들어가서 구경을 하며 웃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바스락 거리는 발자국에,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글을 쓰는게 취미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을에, 만난 우리는, 다음 만날 때 서로에게 편지를 써주기로 했다.
서른이 넘어 시작하는 사랑의 형태는 지난 여름날들과 같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들을 존중했고, 서로의 일들을 사랑했다. 또, 우리는 재미없는 일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 중에 하나인 일하는 시간을 버티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우리가 서로의 시간들을 존중했을지도 모른다.
너의 편지가 나에게 왔을때, 나의 편지가 너에게 갔을때. 너는 나에게 말했다. 나의 글에서 문학적인 결이 느껴진다고. 나는 민망해했다. 그리고 나는 너의 편지에서 가을향이 난다고 했다.
너는 물었다. 가을향이라는 게 무엇인지.
나는 단풍잎, 노란색, 붉은색, 갈색, 그리고 너의 온기의 냄새라고 했다. 너는 웃었다. 그런 향이 어딨냐면서. 나는 그런 너를 조용히 안았다. 이런 것이라고 하며.
우리는 어느새 깍지를 끼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지나가는 개, 우거진 코스모스, 노랗게 된 버드나무. 길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너와 함께라면 그저 오롯이 너라는 하나의 큰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만 같았다.
너의 삶은 고단하고도 재밌었으며, 여리지만 강인했다. 너는 다채로운 사람이었고 너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가을이라는 이름 밖에는 없었다. 계절과는 다른, 너라는 오롯한 사람. 가을.
너도 나처럼 나의 페이지를 읽었다.
나는 별거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저 묵묵히 나의 일들을 하며, 나의 발걸음을 조금씩 내딛는 삶. 하지만 그렇게 화려한 삶도 아니었고, 누군가 책으로 읽는다면 뭐랄까, 평범한 한 사람의 일기같은 느낌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나의 이야기속 행간을 살폈다. 너는 나의 행간이 웃고, 울며, 나를 계절의 이름이 아닌, 겨울. 겨울이라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오롯히 바라봤다. 나는 너를 그대로 사랑했고, 너도 나의 그대로를 사랑했다. 지독한 계절들을 넘기고서야, 지독한 세월들을 넘기고서야. 너와 내가 만났다.
우리는 해피엔드를 딱히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행복까지 가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고되고 힘들지 않을까하고 서로 생각했으니까. 우리는 그냥 지금 행복했으면 되었다. 어떠한 거창한 목표가 아닌, 지금 있는 너와 나의 모습을 우리는 사랑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어느새 같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저자는 공동저자가 되기 시작했고, 너는, 나는,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갔다.
세월은 방향이 되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다시금 가을이 겨울이 되고, 겨울은 다시 봄이 되었고, 여름이 되어 다시 가을로 돌아왔다. 너라는 사람을 계절이 아닌 가을이라는 이름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처럼, 너가 나라는 사람을 계절의 겨울이 아닌, 나, 겨울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처럼 우리는 계절에서 벗어나, 너, 그리고 나라는 너무나도 특별하고도 독립된 인격체로 이제 계절들을 훑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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